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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포

차가운 열대어 2012년 소노 시온

 
 
이 영화에서 선악을 가르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소노 시온. 외계생물체 같은 감독이다. 대범하기도, 저속하기도 하다.
 
이 영화도 역시 두세 번 보았는데, 시간이 난다면 한 번 더 보고 싶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을 끌어올 것까진 없을 것 같다. 
차가운 열대어는 폭력과 일상을 구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타라는, 과거의 진한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 그것을 달성케 했다.
 
 

 
나는 일본영화를 볼 때 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건 그들이 화 내는 방식이다.
목청을 열고 소리를 내지르는 방식. 한데 그게 다가 아니라 특유의 공통점이 있어서다. 
내가 느끼기론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억지로 화를 낸다거나, 화를 낼 줄 몰라 연기교본에 따라 흉내를 낸다는 느낌이다.
 
내가 이상한가? 
나는 일본영화에서 진짜로 실제에 가깝게 화를 내는 배우를 만나본 적이 없다. 영화 갈증에서도, 마더에서도.
그들은 머리를 비워낸 듯이 혹은 아이가 졸라대듯 제가 내는 고함에만 집중한 채 억지로,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
 
혹, 일본인이 가까이 있다면 "당신들 정말로 그렇게 화를 내나요?" 묻고 싶은.
 
여기까지 농담이었고.
 
지금 이 글을 적는 나는 차가운 열대어에 나온 배경음악을 듣고 있다. 첼로 선율. 맞겠지.
제목을 알아보려다가 못했다. 나중에 해야지.
 
 
이 영화를 웃으며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론 폭력을 가장 서정적으로 담아내지 않았나 싶다. 자칫 감상으로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그의 지구별 관측이 더욱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 
 
영화 중반까지는 그에 따른 거부감도 약간은 있는 편이다. 
하지만 결말로 향해 갈수록 거부감은 필연적인 패배감으로, 우리 삶은 패배를 끌어안아야 하는 난파선에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을 머금게 된다. 
 
주인공의 절규와 몸부림. 나약했던 그의 타락. 
그러나 박수를 보내고 싶은, 카타르시스를 그는 흩뿌린다. 
와이셔츠에 물든 핏물과 함께 우리는 모두 타락과 절규를 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들이다.
 
우린 방탕할 수도, 비열할 수도, 서로를 사랑할 수도.
그 모두를 한꺼번에 우주 바깥으로 내던질 수도 있는 '힘' 있는 존재들이다. 
 
소노 시온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한 인물의 죽음은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무라타의 촛불 살인. 불꽃이 타오르는 성전에서 죄악을 뛰어넘는 삶의 성찰이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가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