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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포

엔젤 하트 리뷰 - 흐르듯 박제되는 순간들

 
오늘로써 줄잡아 10,000일쯤에 육박하리라. 언제 다시 꼭 보고야 말리라 기회를 엿보았던 엔젤 하트. 그를 향한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날, 바로 지금이다.
 

 
 
내 그리움의 정체를 공고히 하자면 그 당시 그 시절로 굳이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그려낼 수 있구나, 이 비법 아니 마법에 일조했던 사람들을 더듬던 내 시선이, 오늘날 영화 관(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엔젤 하트로부터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영화가 이토록 매혹적이라면 아마 난 시간의 파산자가 되고 말 게 뻔하다. 과거 내 인지력에 가는 금을 내거나, 숫제 퍽 소릴 내며 산산조각을 내버렸던 엔젤 하트.
 
아마도 알란 파커가 구축하려 했던 세상과, 내 어린 동경 심리가 정확히 맞물리며 일으킨 화학 작용일 터이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도시, 탈탈거리는 차 한 대에 의탁한 채 배회하는 남자, 장대비에 가려진 시야 만큼이나 또는 도시 곳곳을 장악한 정체 모를 비이성적인 믿음 만큼이나 주인공의 정체성 또한 수십 장의 명함으로 분열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 타락된 종교를 향한 경고를 내포한다. 아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점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는 비판받을 여지가 있으나(종종 유색인종을 향한 공격으로 비침으로), 이 점을 마냥 문제시 삼기에는 감독의 역량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만약 그가 편협하다면 혹은 왜곡된 체계를 갖고 있다면, 그 또한 영화의 완성도를 낮추지 못했음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즉 엔젤 하트를 통해 적어도 나는 시간을 뛰어넘는, 뭐라 이의를 달지 못할 장면 장면마다의 완벽성을 체감하여야 했다. 때론 압도되어 피로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엔젤 하트는 한 영화가 한 개인의 특출남을 드러내는 최대치의 장으로서 내 기억을 잠식한다.

만약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면 엑소시스트(1973)가 악마의 악을 다룬 것에 비해, 엔젤하트는 악마와 결합한 인간의 악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니 페이버릿은 악마에게 스스로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자신 적극적인 악을 범하는 것이다.

그해 발렌타인데이에 범했던 의식에 의해 이미 사이퍼의 휘하에서 벗어나 통제 못 할 악에 접어들었다. 그 결과 자신이 지나온 흔적을 잔혹한 쾌락을 만끽하며 말살코저 하는 의도를 발전시킨다.

따라서 우린 악마와 인간이 결합된, 보다 다층적인 악의를 실감케 된다.
 

 
 
과연 그 시절의 영화에는 그 시절만의 배우와 공간이 아름답게 상응하고 있다. 일견 부드럽던 화합이 거친 스파크를 일으키며 갈라설지라도 대조적인 아름다움은 침범받지 않는다.
 
엔젤 하트 속에서 환경은 환경 그 이상으로 인물의 심리를 자극하고 옭죄어 온다.  도시는 날카로운 비명을 울려대며 누군가의 숙명을 길바닥에 내던진다. 비로소 마주하는 정체성의 해결.
 
비록 누구나 바라던 결말이 아닐지라도, 핏빛으로 물든 카타르시스는 오랜 침묵이 되어 입술 끝에 머무는 것이다. 

 

 
 
보실 곳: 유플 검색하여 유료로 보실 수 있고, 티빙에서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