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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페라 입문: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오페라를 듣는 사람과 오페라를 듣지 않는 사람. 그런 구분도 있을 법하다.

오페라. 그들은 훈련과 기교로 즉흥성을 잃었다.

오페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비트겐슈타인 일가에 속한 인물. 그와 절친했던 소설작가에 의해 그려졌다.

검색하면 바로 나오겠지만 너무 피로하다. 무엇이건 정보에 접근하기란. (문장도 가다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철강 재벌이던 가문의 일원으로 혜택을 누리던 사람이었다.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 만큼 천재성이 번뜩였으나 광기 또한 그를 놔주지 않았다. 오페라 광이던 그는 공연을 관람하다 격정을 못 이겨 환호와 박수를 보내어 공연을 방해했다.

온나라가 알아주는 비트겐슈타인 일가에서 고명한 언어학자는 괴짜 취급을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자는 난 데 없이 초둥학교 교사로 입문했으니까.

헉자의 조카(?)였던 주인공 또한 비슷한 성정이었던 모양이다. 작가는 폐렴과 특유의 민감함으로 인물과 우정을 교류하기 어려워했다.

소설은 그다지 두께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도드라진 인물들의 행태에 코를 빠뜨리고 있노라면 어느덧 결말이 다가왔다. 신념에 휘둘렸던 안물의 일대기가 흔히 그렇듯 격정은 한낱 모래시계의 좁은 틈을 흘러 사장되고 만다.

주인공은 가문에게 외면당해 재산마저 바닥난 상태에서 찬거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흔들며 담 아래를 걷다가 작가의 눈에 띄고 만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에 나오기도 하는데, 모든 광휘가 사라진 후 광휘를 잃고 그림자가 되어 외진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에서 빛과 어둠의 찰나를 깨닫고 무상에 휩싸이는 것이다.

우린 어느 때 가장 낯선 옷을 입고 가장 익숙한 거리를 걸을 것인가? 그 강렬한 대조는 삶의 어느 순간도 버려지거나 빛을 잃지 않음을 격렬하게 항변해 준다.

광인에게 감정은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자기 감정에 의해 차단된 그는, 스스로를 박탈당해 주권을 잃는다. 그가 때로 폭력에 지고 마는 건 스스에게서 멀어지는 권리를 붙잡기 위해서다.

존엄성의 권리. 그것을 잃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올지 끔찍하게 잘 앎으로. 따라서 그들은 이해 못할 난동을 피우기도 하나, 실은 어린애의 거친 하소연이다. 두려운 건 정상인의 연맹, 그 안에서 이탈되는 것. 한 번 문이 닫히고 나면 절대로 열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벌써 오래 전에 그를 사로잡았다.

그 영토, 황량한 영토를 함께할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냈으나 온전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과거와 현재의 인물 그들에게 추격당했다...


난 문장 하나를 완성해야 하리라. 내 나라를 집어 삼킨 왕권으로, 날이 저물면 하룻밤을 구걸하는 걸인으로 그것을 완성하리라.

아직도 이런 의무감이 있다는 게 ‘억지이다’.

시간은 내 앞에 많이 있다. 많은 것들과 맞바꾼 시간. 이미 사라진, 누런 종이 위의 그들이 내 앞을 기어다녔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감정. 연민이 될까? 그건 너무 과분하다. 내게 신랄해질 필요성. 그러나 너무 피곤하다.

물 속에서 끊임없이 퍼덕이는 해파리처럼 내 심장은 지쳐 있다. 지쳐서, 과거를 돌아봐도 무덤덤하다. 내 뒤에 깔려 있는 양탄자 그것.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걸음을 옮길까?

기묘한 세상이다. 이것은 내 문장이 아니다. 내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힘은 있다.

내 기묘한 세상은 외출을 금한 실내에서 기묘한 공기를 내뿜는다. 문장은 이미 흩어져 있다. 전혀 아름답지도 솔직하지도 않게.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나는 다른 삶을 꿈꾸기를 멈춘다. 너는 다른 삶을 꿈꾸라고 강요한다. 나는 다른 삶을 꿈꾸기를 강요한다. 너는 다른 삶을 꿈꾸기를 멈추라 한다.

삶이 무언데? 퍼덕이는 해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