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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중

무라카미 하루키 - 재즈를 삼킨 작가,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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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노르웨이의 숲 / 번역 유유정 / 문학사상사

오늘 새벽엔 강하게 천둥이 쳤다. 침대에 누워 비를 예상하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특별히 비를 좋아했던가를 상기해 봤다. 그는 찌는 듯한 여름의 반짝거리는 모래와 그 위를 밟는 비치 샌들을 좋아하지 않았었나가 떠오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뭐 하나 놓칠 리 없는 관찰력의 소유자로서, 그는 심심찮게 비를 묘사했던 것이다.

'비와 눈'이라는 기후 조건이 절대적인 아우라를 형성했던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지만 오늘은 다른 책에 대해 쓰려고 한다. 상실의 시대. 저자가 1986년 12월 21일 그리스의 마케네에서 쓰기 시작하여, 1987년 3월 27일 로마에서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거의 스케치하듯 빠르게 쓰여졌군.

그 무궁한 매력 만큼이나 상반되는 의견이 없지는 않을 수도.
 
 

 
 
하루키는 1949년 1월 12일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이전에 그의 생일을 알았음에도 이제껏 물병자리라 착각했던 이유는 뭘까? 어쩐지 그는 쌍둥이자리나 전갈자리일 것만 같이 생각됐다. 물병자리도, 염소자리도 납득하여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있어 작가는 꽤나 다채로운 성향으로 비춰진 까닭이다.
 

 
 
 
그는 상실의 시대를 보잉 747기 좌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기내의 스피커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 흘러나온다. 바로 사진 속 노래.

 

90년대 EMI에서 발매된 비틀즈 CD

 
 
 
소설은 우아하면서도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에 의해 진행된다.

먼저 주인공인 와타나베 노보루. 이 이름이 본문 중 언급되는 경우가 희박하므로 일부러 기억해둬야 했다. 미국의 은둔형 작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과 유사한 말투의 소유자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키의 인물이 늘 그러하듯 시크하고 고독한 성격. 외부와 일정한 금을 형성하여 언제나 그 바깥에 머무른다.

그의 짝사랑 대상인 나오코는 이 소설의 보이지 않는 히로인이다. 등장하는 분량은 활발한 미도리에 뒤지지만 명실상부 남자들의 로망으로 그려진 여성. 그녀는 학창시절 와타나베와 함께 어울렸던 친구 기즈키의 애인이었으나, 그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장벽을 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그를 잃고 만다. 이로써 삶이 와해되어 결국엔 비극적인 전철을 밟는 인물.

머리 좋고 완벽하다 묘사되는 기즈키를 보고 있자면,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중 데미안이 떠오른다. 차갑고 어른스럽고 배려심 있고 지배적이고.
 

나오코에 대한 가장 멋진 묘사 부분

 
 

이로써 소설의 주제는 일찍이 '죽음'으로 정해지게 된다. 누구나 느끼고는 있으되 딱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 있어 천부적인 무라카미. 정말 대단하다.

 
 
 

소설의 주제가 응축된 한 문장

 
와타나베, 나오코, 기즈키. 이들 삼총사로 인해 자칫 어둡게 가라앉을 뻔한 분위기를 매번 씩씩하게 끌어올리는 기폭제로 돌격대와 미도리가 등장한다. 정말이지 이 둘만 나오면 기분이 '애써' 쾌활해졌다. ㅎ

돌격대는 철마다 옷 한 벌로만 버티는 가난하고 고지식한 청년으로, 그 악의 없고 독특한 성격 탓에 독자들로 하여금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줬다. 공공장소였다면 난처할지도 모를 키득키득 소리^^.
 

돌격대와 주인공과의 코믹한 대화

 

그런가 하면 나오코에 이어 와타나베와 즐거운 로맨스를 나누는 미도리는, 놀랄 만큼 허리가 가늘고 직설적인 성격이다. 오래된 서점집 딸로서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 중이다. 그녀가 남긴 대사들은 솔직하고 엉뚱한가 하면 불평의 와중에도 통찰력을 갖추고 있어, 그녀의 빈부에 대한 언급은 오늘날까지 내 주위를 맴돌 정도이다.

 

미도리의 넋두리 중 "정말로 가난하면 남들 앞에서 돈 없다 말하지 못해."

 
 
또한 와타나베와 같은 기숙사를 사용하는 나가사와도 등장한다. 치과의사를 부친으로 둔 그는 잘 생긴 인기남이나, 기즈키와는 달리 내면에 잔혹성을 감춘 비뚤어진 성품이다. 그에게는 하쓰미라는 고상한 여자친구가 있었으나, 와타나베의 예감처럼 훗날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
 

나가사와의 대사 "가능성이 넘치는데 그냥 지나치라는 거야?"
 

 
이밖에 나오코가 머물던 요양원에서 알게 된 레이코 여사가 있다. 이모뻘인 그녀와의 결말 부분이 그 당시 충격과 동시에
강한 해방감으로 날 이끌었다. 레오코와의 귀결이 필연적이라 여겨질 만큼 작가의 필력엔 설득력이 진했다.


마지막으로 간략한 후기가 첨부돼 있다. 이 소설은 '개똥벌레'라는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 원래는 가볍게 시작했다가 길어졌다는 것. 또한 감각의 차원에 속하는 개인적,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이렇게 소설을 한번 살펴봤다. '상실의 시대'는 명실상부 이삼십 대를 위한 소설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 이하로도 이상으로도 얼마든지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곳곳에 넘치는 기지, 특유의 감수성, 명언집보다 훨씬 더 명언다운 대사들.

머리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소설이다. 물론 소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써뒀던 건데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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