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드라마

라우더 댄 밤즈-죽음이 던진 것

 

 

요아킴 트리에 감독과 제시 아이젠버그가 만났다. 둘 다 끌림이 있는 인물들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셋으로 압축된다. 첫째, 이자벨 위페르의 서늘하다 못해 어느 경지를 넘어선 눈빛 연기. 둘째, 제시 아이젠버그의 아내와의 어긋남. 셋째, 막내 콘라드가 작성한 메모였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다. 내 기준으로 그녀처럼 피로감을 주지 않는 여배우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니까. 제시 아이젠버그도 물론 뒤지지 않는 배우고. 하지만 내게 정말 신선했던 대목은, 막내 콘라드의 메모를 처리한 감독의 독특하고도 참신한 방법이었다. 

 

메모의 내용을 독립된 장면으로 시각화하여 마치 광고처럼 분위기를 환기시킨 게 그것이다. 그 점이 어둡고 반항적인 콘라드의 인상을 쇄신하여 영화의 질마저 두 단계 상향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인지 선하고 관조적인 형 조나(제시 분)보다 막내 콘라드가 두드러진 게 사실이다.

 

보다 방법론으로 들어간다면 라우더 댄 밤즈의 관전 포인트는 '시간'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부가 모여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기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간을 이름이다. 아내이자 엄마의 생전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이후 그녀의 전기를 찍기까지가 아버지, 장남, 막내의 시점으로 각각 교차, 배열된다. 그 과정 속에서 세 사람의 로맨스는 폭탄보다 큰, 아내이자 엄마의 마지막 유산에 힘입은 듯 저마다의 고통이 선행된 '자각'이라는 형태로 종말에 이른다. 

 

긴 노정 끝에 흩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여느 종군기자의 체험담에 빚을 진 대본 덕택일 것이다. 체험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맥락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다. 이처럼 함축적인 시간의 밀도는 뭘 의도한 것일까? 영화는 기자의 눈을 통해 간접적인 죽음의 체험 이후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최후의 '아기'는 현자의 모습으로 드러나나니, 죽음이 가져다 준 고귀한 선물인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종군기자를 자발적인 죽음의 길로 이끌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통은 깨달은 자의 몫이므로.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자, 탄생의 의미도 알 수 없음을 영화 초기 음식을 잊은 조나와 음식에 집착하는 아내의 모습을 대비해 이미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