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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

유다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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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에게 ‘말’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서로를 어떻게 속였을까?”

“애초에 말이 없었다면 속인다는 자체도 없었을 거야.”

 

그녀는 그랬다. 아무래도 편식 경향이 강한 탓인지 한 단계가 끝나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번에 차례가 돌아온 건 L이었다. 그의 차례는 꽤 자주 돌아왔다. L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누군가 영원히 남기고 간 음악을 듣는 체험은 특이한 감을 줬다. 돌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라니, 이게 다 그가 젊어서 떠난 탓이다.

 

내가 이리 감상적인 사람이었나?’

 

음악은 스스로의 다양한 면들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취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 얘길 꺼내려고 구태여 L까지 동원해야 했나? 그녀는 이런 방법이 아니고선 제 얘길 털어놓을 줄 몰라서이다. 이미 전부터 길다면 긴 세월을 허송했다. 제 얘길 털어놓을 수 없는 불능. 불행하다.

 

L에게 돌아가자. 가수의 음악과 인생. 그녀가 아는 바는 부족해도 영상 속에는 꽤 많은 힌트가 들어 있다. L은 왼손잡이지만 오른손도 꽤 많이 써서 볼수록 헷갈렸다. L은 무섭지 않았을까? 자신이 담긴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다는 것.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스타 중에서도 스타니까 그쯤이야 초월했겠지.

 

음악을 듣는 날이면 아침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매번 있는 아침이 아니었다. 한창 밤 생활이 이어질 적엔 다음날 아침을 잠으로 허비했다. 눈을 뜨면 벌써 한낮이고, 정신을 차리면 그새 밤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잡아먹고 나면 잠의 패턴은 조금씩 밀려 정상으로 돌아와 있다. 마침내 맨정신으로 아침을 맞게 되면 제법 엄숙해져서는 커튼을 끌어당겼다. 햇살은 너 오랜만이다 하는 기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침대 발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아침이면 어딘가 부끄러웠다. 아침 인사는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L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는 제 집의 제 방이었다. 무대에서 성난 맹수마냥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그가 최후로 선택한 장소가 하필 방이었다니. 숲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이 아니라서 더욱 안타까웠다. 보다 나은 장소를 원해선 안 되었던가?

 

그녀가 종종 그를 좋아하지 않는 척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빅 스타여서였다. 또한 그의 음악 세계도 거대하여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작고, 낮고, 영원하지 않은 걸 선호하는 그녀에게 L은 반대였다. 음악계에서 거의 독재자마냥 장기 집권했고, 공백기마저 별로 없었다. 지구 전체가 알고 있는 그를 음악성을 떠나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의 창조하는 물길은 열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금의 막힘도 없이.

 

그의 섬세하게 이어지는 보컬의 고비마다 불쑥 떠올라 휘저으며 난도질하는 광폭함을 그녀는 아침 내내, 주말 내내 함께할 것이다. 그녀가 어떤 걸 느끼든, 느끼지 않든 순전한 자유였다.

 

 

“그렇다면 말을 통해 솔직해질 순 없을까?”

“누구나 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하지만 예를 들어, 좋아하는 걸 설명하기가 간단한지는 의문이야. 싫은 걸 설명하기보다 좋은 걸 설명하는 데에는 훨씬 노력이 든다니까? 만약 누군가 아무 갈등 없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 무게를 저울질해 볼 만하다는 거지.”

 

또 시간이 흘렀나? 말하자면, L에게 지친 건 아니지만 잠시 도피를 감행했다. 이번에 고른 곡은 Y의 것들이었다. 그는 L과는 색깔이 사뭇 다르다. 거의 방향이 다르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제 그녀는 L에게서 하강해 지상에 안착했다. Y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가수지만 예전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특유의 금빛 머리카락은 푸석거리며 흩어졌고, 젊음의 상징이었던 홍안 또한 실컷 얻어맞은 듯이 주저앉고 말았으나 음악만은 변치 않았다.

 

그의 음악 언어는 매우 내밀하다. 무슨 생각을 갖고 음악을 만드는지 짐작할 수 없다. 혹시 그는 우울한 사람일까? 그게 사실이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음악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사람이 우울하다니, 필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우울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수분감이 음악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를 꼭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

 

그가 연주하는 곡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음악과 함께하면 할수록 오롯이 혼자였다. 비보를 전할 곳조차 전무했다. 주체 못할 감정으로 덜커덩거리는 전철에서 쫓기듯 내렸다. 그녀는 점점 더 혼자였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무리를 지었다. 비보의 당사자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절 위한 눈물을 흘렸다.

 

더 이상 날 위해 울지 말자.’

 

케케묵은 맹세도 소용없었다. 남을 위한 눈물이면 남의 눈에서 나올 일이지, 제 눈에선 아닌 것이다. 눈물은 치료제가 아니던가. 제 눈의 눈물은 저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마저 더해지자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었다. 강렬하게. 어딘가 먼 곳에서 절 만나고 싶었다.

 

Y는 그녀에겐 영웅이었다. 그녀는 그 말고도 영웅을 몇 명 더 소유했다. 영웅이자 연인.

 

경쾌함에도 아픈 음악을 들어 봤을 것이다. Y의 곡들이 더러 그러했다. 그런 뒤섞인 감정을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다. 꼭 음악에 속는 기분이었다. 진실의 매서움을 감안하면 조금쯤 속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저 리듬을 들어 보라. 그녀는 차라리 듣고 싶지 않다는 갈등마저 겪었다. 격류에 휘말리기 버거워서다. 사람은 너무 많은 감정을 지닌다. 그것은 삶을 불안으로 내몰 뿐 불필요하다. 신은 절제를 가르치기 위해 인간을 감정의 홍수 속에 밀어넣었다. 그거야 말로 오만한 착각이다. 제 피조물이 감정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비참함을 수도 없이 봐 왔다. 뉴스를 끊어야겠다.

 

 

“그러니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한 거짓말을 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거잖아.”

 

이제 R의 차례로 넘어왔다. 한때 그녀가 록의 기준점으로 삼은 적이 있던 R. R을 듣느냐, 안 듣느냐로 팬층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의 음성을 묘사해 보자. 가만히 힘을 뺀 목소리는 고음에서도 결코 힘을 주지 않는다. 목소리 자체가 울림이 큰 속삭임이다. 그 속삭임은 대지를 뒤덮고도 남는다. 그런 음성은 축복이나, 그가 또한 얼마나 사라지고 싶어하는지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악했다. 그러자 더욱 둘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

 

R은 그녀에게 있어 영웅은 아니다. 표현하자면고백이랄까? 그것도 쉽지 않은 고백.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머물다 온 사람으로서 그는 고백을 해야 했다. 높이 날려면 낮은 곳에 있어 봐야 한다. 멀리 뛰려면 도움닫기 하듯. 물론 낮은 곳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높이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에겐 불가능하고 분통 터지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얼마나 화를 잘 내는 동물인지 산더미 같은 증거물이 있다.

 

이쯤에서 솔직해진다. 사실 R을 안 들은 지 꽤 됐다. 팬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줄창 듣거나, 진정한 팬임을 주장하는 채로 듣지는 않거나. 그녀의 방 안에는 이런 식의 은폐된 거짓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실험적인 음악과 멋 부리지 않은 노출. 아마 그녀가 십 년을 건너뛰어도 변함없이 그의 광팬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를 처음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생생하다. 뛰어남은 충격을 동반한다.

 

**

 

오전 1034. 예정보다 일찍 작품집을 끝마쳤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소요될 줄 알았는데 뭔가에 홀린 듯 결말에 다다랐다. 만약 [자화상]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작조차 어려웠을지 모른다. 작업하는 내내 자화상의 부림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던 그녀는, 작품집을 완성해 놓고 한동안 탈진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작품집을 전송받은 세은이 연락을 해 왔다. 세준의 여동생이자 협회의 직원인 세은.

 

벌써 마쳤어?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

 

곧 있을 겨울 시즌을 앞두고 작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 위에 하나를 더한다고 특별할까.

 

, 마치고 보니 딴 때보다 이르더라.”

늦는 것보다야 낫지. 어라, 그런데 작품마다 제목이 안 달려 있네?”

 

단말기 너머에서 작품집을 넘겨보던 세은이 조심스레 오류를 지적했다. 그녀는 이럴 줄 예상했으면서도 대답이 조심스러웠다. 이 기회에 앞으로의 각오를 밝혀야 옳은 걸까?

 

이젠 말로써 작품에 관해 속이지 않을 거야.’라는.

 

무슨 대단한 선언 같아 망설여졌다. 게다가 그 말을 입에 올려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 세준이었다. 그에게 부단히 속으며 사는 동안 그녀의 작품 세계는 극단을 치달았다.

 

제목은 하단에 적어 뒀어.”

 

필요 이상 딱딱한 어조가 나왔다. 설득보다야 설명이 나을 것 같아서.

 

이건 제목이 아니라 숫자잖아. 혹시 임시로 달아 놓은 거야?”

임시 아냐, 계속 그걸로 가려고.”

“......”

 

세은은 잠시 입을 닫은 후에 체념했다.

 

알았어. 위에다 전달할게.”

고마워.”

 

윗사람들의 반응은 걱정 안 해도 되었다. 원래 멀리 떨어진 높은 사람보다 가깝고 낮은 사이가 더 장벽이므로.

 

얼핏 보아도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네?”

 

뭐가 미진한지 세은은 바라지도 않는 감상평을 덧붙였다. 그녀는 아무 대꾸 하지 않았지만 내심 사실임을 인정했다. 이번만큼 영감이 넘치면서도 힘에 겨웠던 작업은 드물었다. 몇 달 내내 휴식은커녕 잠조차 편안히 이룬 적이 없었다. 매일이 스스로를 쥐어짜는 과정이었으나 완성품을 내놓고도 끝끝내 충분하지 않았다. 너무 성급히 작업을 덮고 만 게 아닐까? 아직도 그녀 내부에는 출구를 못 찾아 쿵쿵 부딪치는 뭔가가 남아 있었다. 이대로 방치할 순 없을 듯했다. 첫 번째 움직임은 자화상을 추적하는 것. 세은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전에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뭐 건진 거 있어?”

 

지나가는 말인 듯 꾸미려 했으나 목이 부자연스럽게 쉰 소리를 냈다. 헛기침을 누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세은이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어디다 알아봐야 할까? 마땅한 데가 없어 택했으나 좀 찜찜했다. 오빠도, 여동생도 여기까지가 다인 모양이었다.

 

, 그거?”

 

유난히 무심한 말투가 건너왔다.

 

 

최근 그녀가 벌이는 일들의 이면에는 자화상의 존재가 짙게 자리했다. 뜻밖에 만난 영상 속에서 싸구려 건반 위를 날 듯이 내달리던 열 개의 손가락. 그 주저 없는 동작에 의해 그녀가 장기간 빠져 있던 슬럼프를 종식시켰다.

 

누가, 어떻게 저런 영상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적어도 수익을 노리고 만든 영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초보 중의 초보가 시험 삼아 올렸다가 포기하고 망각한 수준이었다. 제목인 자화상도 실은 관련 없는 자가 억지로 붙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사납게 출몰한 영상. 이 곡을 만나기 위해 그녀는 일생 동안 수만 킬로를 행군해 온 느낌이었다. 전에도 운명에 비할 곡들이 없진 않았으나, 세준의 곡을 포함해 다들 이미 어느 정도는 반열에 올라 있었다. 자화상은 예외였다. 수면에 잠긴 채 건져 지길 기다렸다. 그녀의 권유로 곡을 접했던 사람들도 인정했다시피, 싸구려 건반에도 불구하고 연주자의 음계 하나하나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다. 그런 정확성을 이전에 어디서 만났던가.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 소름 끼치는 천재성...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무지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업계의 종사자들조차 자화상의 가치에 어두웠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그녀도 차츰 현실임을 인정했다. 그들이 일종의 눈뜬장님이라는 걸. 다른 누군가는 그보단 나았으나 기피하기론 마찬가지였다.

 

그래, 곡은 좋아. 그대가 왜 흥분했는진 나도 알 것 같아. 그런데 좋은 곡들이 어디 한둘이야? 재야에 숨은 인물은 그만한 이유가 있더라고. 만약 찾아냈다가 이쪽에 매달리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니까? 그래도 혹시 찾게 되면 나한테도 공유해 줘. 나도 정체가 궁금하긴 하거든.”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 ‘이러니 에이미라는 가수가 스물일곱 살을 못 넘겼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세은에게 작품을 넘긴 다음 모처럼 휴식을 누렸다. 방해받지 않고 자화상에 전념할 수 있어 황홀했다. 하지만 기운이 소진됐다. 아무 잡념 없이 즐기기만 할 순 없는 연주였다.

 

연주자를 꼭 찾아가야 할까?’

 

생각이 군데군데에 흠집처럼 고였다가 지나갔다.

 

그 사이 잡지사와도 인터뷰를 했다. 기자의 첫 질문은 제목에 관해서였다.

 

글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작품집은 의미와 동떨어져 추상적으로 보여요. 여덟 단위의 숫자들은 종말의 임박인 듯 느껴지고요. 애초에 의도하신 건가요?”

제목은 편견을 만들거나 작품을 부풀리기도 해요. 저는 거기서 탈피하려고 제목을 정하지 않았어요. 숫자는 글에 비해 정직할 수 있으니까요. 제목으로 사용된 숫자는 작업이 시작된 날짜와 시간이에요.”

 

그녀는 어휘를 골라가며 전달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예상대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미래에도 계속해서 겨울 풍경만 담으실 건가요?”

 

그녀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녀가 유명세를 띠기 시작한 건 여름 들판을 겨울의 느낌으로 표현한 데부터다. 기법을 써서 색채를 날리고, 투명한 햇살은 어둡게 처리했다. 또한 그녀의 풍경 안에는 단 한 명의 인물도 담기지 않았다.

 

기자가 돌아가자 몹시 피로했다. 그 상태로 다시 자화상에 몰두했다. 보통은 감화를 받더라도 몇 개월 후면 시들해지건만 자화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향력이 커져 갔다. 이젠 숫제 그녀의 주인 같았다.

 

뭔가 큰일이 올 것 같아. 날 마구 뒤흔들어 원래대로 되돌려놓지 않을 일.’

 

 

오후가 되자 손이 시릴만치 바람이 쌀쌀했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어쩔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주소가 가리키는 장소가 하필 그녀가 나고 자란 시골 마을이어서다. 정확히는 작은 교회당에 붙어 있는 목사관이었다.

 

처음 세은이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좁은 동네의 인구 변동이 적은 그곳에서 떠올릴 만한 얼굴이라곤 딱히 한 사람을 제외하곤 없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억으로 인해 도리질했다. 성탄절 날 거둬졌다 하여 노엘이라 불린 아이. 누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너나없이 그 애를 괴롭혔다.

 

지금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는 나무들과 시커먼 바위가 노출되어 있는 헐벗고 황량한 땅은 어릴 적 그 애의 모습과 똑같았다. 뿐만 아니라 어찌된 노릇인지 수년간 몇 차례의 굴곡을 거친 자신의 작품 세계와도 일치돼 보였다.

 

지금 난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일까?’

 

두 사람은 나이가 엇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노엘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고, 이후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뭣 하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였지만 단 한 순간 그녀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교회당에서 혼자 연주하고 있던 그와 마주쳤을 때였다.

 

그 앤 숫제 딴사람 같았어. 그리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언제 봐도 금방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질 것만 같던 작은 모습은, 전에 없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목적지인 교회를 확인하곤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녀가 종종 그 앞을 지나다니던 교회였다. 약속 시간이 다 됐음에도 교회당은 비어 있었다. 낡고 허름한 문짝에 붙어 있는 메모지만이 목사와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사정이 생겨 방문객을 기다리지 못하게 됐다는 몇 글자뿐, 그녀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녀는 목사의 안내를 포기하고 스스로 목사관 쪽으로 향했는데, 담벼락에 나란한 창고 방에 끌렸던 까닭이다. 하지만 가까이로 갈수록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소리가 있었다.

 

유다! 넌 노엘이 아니라 유다야!”

 

동네의 조무래기들은 그를 짓궂게 따라다니며 놀렸다. 습관도 아니고, 즐거움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알고 보면 그것은 팽팽한 대립이었다. 1대 다수의 싸움에서 노엘은 혼자 버텨 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안 되었다. 노엘의 주변에는 늘 까닭 모를 불쾌한 기운이 떠돌았다. 조무래기들 모두가 공범이었고 씻을 수 없이 치졸했으나, 막상 누굴 탓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곤 했다. 어른들이 개입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으리라. 그 미개한, 원시적인 앙갚음을 겪는 동안 노엘은 굳게 입을 닫았다. 과묵이라기보단 말을 버거워했다. 수업 중에도 입을 열지 않던 그를 그녀는 기억했다.

 

차라리 그도 치졸했더라면 일찌감치 끝날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도 치졸함에 지지 않았다. 딱 한 번이면 족할 텐데 그마저 거부했다. 마치 순교자처럼 구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오기를 내세울 적에도 바보처럼 순진했다. 콧속에 빨려 들어오는 비 올 공기를 감지해 내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그런 면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그러나 밤에 불을 켜면 창문이 어두워 밖이 보이지 않았다가 불을 끄면 그제야 보이게 되듯, 인간은 서로를 동시에 깨닫지 못할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그날도 노엘은 운이 나쁜 하루였다. 교회당에서 들리는 건반 소리에 이끌려 들어갔던 그녀는, 피아노를 마주한 뒷모습을 발견하곤 행여 혼자 울고 있지나 않나 겁을 냈다. 하지만 그는 누구 앞에서도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가 연주를 멈추었다. 그녀는 볼일이 없었으므로 급히 나가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그녀를 향해 돌아앉은 뒤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단 사실이 너무도 기이했다. 그리고 그 눈이 망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무영아.”

 

말소리가 분무처럼 공기를 적셨다. 모두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이상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근사하다고 칭찬받아도 무방했다. 그가 말을 꺼내는 데 실패할 거라 예상했던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영아.”

 

그가 다시 불렀을 때 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그녀의 눈앞에는 불을 끈 뒤 바라다보이는 창문 너머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자신을 부르기 위해 연습하는 장면이 빠르게 스쳐갔다. 부르고 또 부르고...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서리쳤다. 그리고는 창 안에 불을 켜 그의 모습이 사라지게 했다.

 

 

밤이 깊었어도 창고 안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조그만 정사각형의 창을 통해 누군가 내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달빛이 희박하기에 다행이었다.

 

그도 많이 바뀌었겠지?’

 

이 우연한 각본을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 차문을 열고 나와 창고 앞까지 걸어갔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노크를 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한 발짝만 나와 봐.’

 

그러나 거짓말처럼 문이 열린 순간 한 발짝만 내디뎌야 할 차례가 왔음을 깨달았다. 눈을 들자 방 안의 벽면에는 익숙한 작품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살짝 모욕감을 느낀 그녀였으나 그를 향해 무너지길 주저하지 않았다.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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